이브닝 근무가 끝나면 보통 자정을 넘겼습니다. 병원 밖으로 나서면 가라앉은 밤공기를 밀쳐 내듯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숨 쉴 틈 없이 일했던 날일수록 어딘가에 있는 달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달을 보며 위안받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에는 현관문을 닫는 순간부터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아 삼십 분쯤 울고 나면, 그제야 스탠드를 켜고 일 년 전에 써 둔 일기를 꺼내 읽곤 했습니다.
신규 간호사에게 어떤 책을 건네면 좋을지 생각하다 보니 그 새벽의 제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제게 필요했던 건 더 많은 지식만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부족함을 마주하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말, 내가 겪는 일이 나만의 일은 아니라고 느끼게 해 주는 기록, 그리고 잠시라도 마음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시간이 함께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그때의 저에게 책을 보낼 수 있다면, 이 다섯 권을 건네고 싶습니다.
목차
- 취약한 나를 인정한 뒤에, 마음가면
- 다른 나라 병동의 밤, 돌봄의 언어
- 같은 종양내과를 의사의 자리에서,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마음이 경고등을 울리던 여름, 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
- 간호사들이 내 이야기라고 말해 준, 나이팅게일은 죽었다
- 임상 공부 책을 찾고 있다면
- 이 이야기가 담긴 책
취약한 나를 인정한 뒤에, 마음가면
신입 간호사의 하루는 모르는 것투성이였습니다. 환자에게 작은 변화라도 생기면 혹시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불안했고, 일을 마친 뒤에도 머릿속으로 그날의 간호를 몇 번씩 되짚었습니다. 매일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인정하는 일. 스스로 과연 간호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수십 차례 묻는 일. 제가 일 년을 보내고 쓴 일기에는 그런 문장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병동에서는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았고,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자격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모르는 것을 묻지 못한 채 혼자 끌어안는 마음은 결국 저를 더 작게 만들곤 했습니다.
브레네 브라운이 쓰고 안진이가 옮긴 『마음가면』(더퀘스트, 2016)을 읽으며, 취약함을 감추는 것이 반드시 강한 태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오래 생각했습니다. 저는 취약한 저를 인정하고 나서야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 그때의 제가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 순간마다 덜 움츠러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나라 병동의 밤, 돌봄의 언어
간호사의 일은 큰 처치와 극적인 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환자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돕고, 몸 아래 깔린 소변 줄을 빼 주고, 스스로 뱉지 못한 가래를 걷어 내는 일. 치료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중요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는 작은 돌봄의 가치를 저는 언제나처럼 믿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티 왓슨은 영국에서 이십 년 넘게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그 시간을 쓴 『돌봄의 언어』(김혜림 옮김, 니케북스, 2021)에는 소아 병동과 정신과, 응급실과 호스피스에서 만난 환자들의 삶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나라와 병원의 제도는 다르지만, 한 사람의 몸과 마음 가까이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자리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내가 겪는 일이 나만의 일은 아니라는 것을 다른 간호사의 문장 속에서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나이팅게일은 죽었다』와 같이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조금 두꺼운 책이지만 하루의 근무가 끝난 뒤 한 장씩 끊어 읽어도 괜찮습니다.

같은 종양내과를 의사의 자리에서,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종양내과 병동에서는 한 환자를 사이에 두고 의사와 간호사가 수없이 말을 주고받습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거나 혈압이 낮아지면 당직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검사 결과를 알리고 환자의 변화를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환자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각자가 보고 느끼는 것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신규 때의 저는 짧게 내려온 처방 뒤에 어떤 고민과 판단이 놓여 있는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인 김범석 교수가 쓴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흐름출판, 2021)는 암 환자와 그 곁의 가족들, 그리고 의사로서 품었던 속내를 적은 책입니다. 종양내과라는 같은 공간을 간호사의 자리에서 지켜본 제게는, 그 공간을 의사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환자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는 무력감은 의료진에게도 각자의 모양으로 남습니다. 더는 해 줄 것이 없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 병동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계속 환자 곁에 서 있는 걸까. 제가 수없이 되물었던 질문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시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경고등을 울리던 여름, 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
마음이 경고등을 울리던 어느 여름이 있었습니다. 마인드풀tv의 명상 영상을 틀어 놓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맞춰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울음을 그치고 나서야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희망 같은 것이 올라오는 걸 느꼈습니다. 그 뒤로 아침저녁 십 분씩 그 목소리를 따라 명상을 하곤 했습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동생이 두통과 감정 기복으로 힘들어했을 때도 명상을 권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결국 영상 링크를 보냈습니다. 정민의 『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비채, 2021)가 그때 제게 있었다면, 영상 링크와 함께 이 책을 건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규칙한 근무 속에서 마음을 돌보는 일은 자꾸만 뒤로 밀렸습니다. 나이트 근무를 위해 오후 여섯 시에 눈을 뜨고, 남들이 잠드는 시간에 출근하던 생활에서 정해진 시간에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아침저녁으로 십 분씩 가만히 앉아 있었던 건, 대단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마음이 어디쯤 와 있는지 잠깐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간호사들이 내 이야기라고 말해 준, 나이팅게일은 죽었다
마지막 한 권은 제가 쓴 책입니다. 제 책을 제 목록에 올려놓는 일은 여전히 조금 멋쩍습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두는 이유는 『나이팅게일은 죽었다』의 2부가 종양내과 간호사의 낮과 밤,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를 숨기지 않고 적은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남들 잘 때 우리가 하는 일, 오프 날이면 밀려오는 감정, 어느 날의 나이트 근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복기한 기록, 부디 내 몸이 잘 견뎌 주기를 바라며 산 요가 쿠폰. 그 안에는 아름답게 정리된 간호사의 모습보다 무표정으로 일하고, 때로는 환자의 요구조차 버겁게 느끼고, 일이 끝난 뒤에야 혼자 울 수 있었던 한 사람의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책 뒤에 추천의 글을 써 준 삼성서울병원의 장송자 간호사는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신입 간호사 시절이 떠올랐다고 적었습니다. 분당서울대병원의 박효진 간호사는 저자의 이야기이지만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제게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이 기록이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신규 간호사에게 이 책을 건넨다면 1부보다 2부부터 펼쳐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을 기록한 책이기 전에, 그 곁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몇 번이고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일을 이해해 보려 했던 기록이 그곳에 있습니다.
임상 공부 책을 찾고 있다면
약물과 검사 수치, 인계 요령을 익히기 위한 책을 찾고 있다면 이 다섯 권은 맞지 않습니다. 그런 공부에는 각 병동에서 받은 자료와 프리셉터의 설명이 더 정확합니다. 저도 매일의 업무를 익히는 동안 수많은 의학적 지식과 간호 술기를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공부하고도 마음은 쉽게 잠들지 않았습니다. 출근하기 전날이면 병원 꿈을 꾸었고, 실제로 했던 실수를 꿈속에서도 반복하며 혼나곤 했습니다. 위의 책들은 그런 밤에 필요했던 책들입니다. 조금 흔들렸다고 해서 간호사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이 길을 걷는 동안 자기 마음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말해 주는 책들입니다.
제가 그 첫해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는 신규 간호사 버티기에 따로 적었습니다.

